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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사피엔스 중 상상속의 질서에 대하여

들어가며

최근 – 이미 작년이 되어버렸지만 –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를 초빙하여 TV에서 강연하는 것을 보게 될 정도로 책 ‘사피엔스’는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저자가 하나의 생물학적 ‘종’으로서 인간을 다루기는 하는데 생물학적, 역사적, 철학적, 문화적, 정치적 등 여러 관점에서 색다른 시각을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사피엔스’ 종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바라왔던 ‘행복’에 대한 고민을 중간중간 놓치지 않으며 마무리 했기에 호응이 좋았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상당히 방대하므로 모두 이야기 할 수는 없겠고, 저자가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이유로 꼽은 3가지 주요 혁명인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중에서 인지혁명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두고, 그와 관련된 생각의 여러 조각들을 책의 안과 밖에서 찾아 둘러보려 한다.

흔히 ‘지배’한다는 것이 이런(아래 동영상)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가 말하는 ‘지배’란 해당하는 생물학적 종이 그 DNA를 가진 개체 수를 타 종들 보다 우월하게 지구상에 퍼뜨린 것으로 이해하며 시작하는 것이 책의 흐름상 맞겠다. 마치 ‘중생대 때 공룡이 지구를 지배했다.’라는 말처럼…

 

 

MAN / Steve Cutts

그런데, 생물학적 ‘지배’를 위해 개체 수를 늘리게 되면 그 종은 성공한 것인가? 사람에 의해 양육되어 전세계적으로 250억 마리로 개체 수를 확대되었지만 조류인플루엔자 발생시 살처분 되며, 좁은 닭장에서 음식재료로 키워지는 닭은 행복한가? 종의 번식과 개체수가 늘면 하나하나 개인도 행복한가?

종의 번식과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는 종(크게는 인류, 작게는 국간, 민족, 그리고 지배계급 또는 특정집단까지)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서는 개별적 개체들의 상대적인 희생이 있어 왔다. 인류는 그런 희생자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위한 논리로서 우리 모두를 위한 희생을 정의의 기준으로 만들기도 하였고, 태어날 때부터 다르게 태어났다는 계급적, 인종적 차별론을 당연하게 인식하게끔 하였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등장한 것이 일종의 ‘실제 존재한다고 믿게 끔 만들어진 논리’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믿어지게 되면’ 하나의 가치기준이자 질서와 법으로서 현실 세계에 강력한 힘을 미치게 된다.
이것이 인지혁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므로 이것부터 살펴보자.

 

상상의 질서 (상상속의 질서)

‘질서’는 지켜짐으로써 무엇인가 잘 정리되고 효율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서, 어느 가치판단 기준으로부터 시작되어 결과적으로는 논리적인 글이나 이야기로 설명되어 질 수 있게 표현된 어떤 체계를 말하는 듯 하다. 작은 집단에서는 관습에 의한 무언의 약속일 수도 있고,  큰 집단에서는 강제력을 갖는 명문화된 법일 수도 있겠다.

저자가 말하는 ‘상상의 질서’는 인류가 생각과 가치기준에 다양한 논리와 연관성 있어 보이는 증거를 결합하다 보니 ‘마치 실재하는 사실처럼 믿어지고 따르게 된 사회적 가치기준과 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들고 있다. 특정 항목을 지칭하지 않고 넓게 보면 종교, 정치사상, 경제체제 등으로 볼 수 있겠다.
* 이후 내용에서 ‘상상의 질서’라고 하면 이것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생각하자.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오해가 시작되면 서로 불편해하므로 사족을 붙이면…
저자는 인간, 특히 호모 사피엔스 종을 최대한 외부적이고 객관적 관점에서 고찰을 하자는 것이므로 –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가 – 특히나 저자가 언급한 기독교,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우선적인 가치라고 당신이 믿는다고 하여 거북해할 필요는 없다. 예수, 마호메트, 붓다, 공자가 과거 실존 했음과 그 행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에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종교화 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상상속의 질서’는 요즘과 같이 계급제도가 대부분 사라지고, 민주주의 사상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오늘 날에는 시대적 요구(각 개인들의 욕망이 투영된 그 무엇이 대세가 된 경우)에 의해서 탄생하거나 점진적으로 생성되어지는 경우도 많겠으나, 계급의 구분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과거에는 – 저자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류는 농사와 목축을 하였고, 소수 엘리트라고 자칭했던 그들의 활동이 기록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라고… – 그 지배계급들이 서로 세력을 얻기 위한 정치를 위해, 피지배계급에 대한 통치논리를 만들기 위해 개발되어 온 것이 더 많은 듯 하다.

그래서인지 고대나 중세 초기까지의 ‘상상의 질서’는 지배계급들(옛날엔 거의 정교일체였으니)이 가장 강력한 권위인 해당 집단 내 대다수가 믿는 신(神)으로부터 시작되어진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라고 주장했다’로는 부족하다, 신(또는 신의 대리인)이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어야 했었다.

이후 중세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에 다가서면서 자연권/인권에 대한 개념이 강화되었고 ‘상상의 질서’를 인류의 다수 구성원이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조차도 상상의 질서)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읽을거리] 인권(人權, Human Rights)

(서양역사의 관점에서) 근대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상상의 질서’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인권’이다. 근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인권신장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인위키피디아-인권(자연권)’편 또는 나무위키의 인권 편을 보면 미국의 독립선언(1776)과 프랑스 인권선언(1789) 쯤이니 법이나 제도에 의해서 인권이 인정받은 것은 먼 옛날의 일도 아니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등에서 인권을 먼저 규정하고 있다.

미국독립선언서(1776년) 중 인권의 유래 부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프랑스인권선언(1789년) 중 인권과 주권의 유래에 대해 1조-3조
제 1 조,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제 2 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를 보전함에 있다. 그 권리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등이다.
제 3 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떠한 단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유래하지 않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시간이 된다면 세계인권선언문의 도입부분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왜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것, 존중 받는 것, 모멸감을 받지 않는 것이 왜 기본적인 자연적 권리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1948년)의 전문(前文) 중 일부
모든 인류 구성원의 천부의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및 평화의 기초이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격분시키는 만행을 초래<하였으며, 인간이 언론과 신앙의 자유, 그리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계의 도래가 모든 사람들의 지고한 열망으로서 천명되어 왔으며,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강요 받지 않으려면, 법에 의한 통치에 의하여 인권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회/집단의 구성원(들)이 상당히 의식적으로 만든 질서와 체계 모두를 저자가 말하는 ‘상상의 질서’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상상의 질서는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진리이고 실재한다고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어야 하는데, 이 조건을 갖추기가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에 쉽지만은 않다.

  • 근본적 논리부터 우리가 순수하게 창조한 질서의 논리라면 다른 이들에 의해서  ‘만약 틀렸다면?’이라는 의구심이 남게된다.
    이 의심은 (질서를 지키지 않을) 반론 집단을 만들뿐더러, 질서가 유지 될지 아닐 지가 불확실 해지게 되며, 그 결과 사람들은 점차 그 질서를 따르는 수고스러움을 ‘투자’하지 않는다. 곧 그 질서가 해체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직접 만드는 과정을 겪었거나 곁에서 그 과정을 관찰한 질서의 논리는 (바로 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신에 의한 것 또는 기존의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보다 그 권위가 약하다. 권위가 약하면 의심이 허용되고 역시 선택의 대상으로 여겨져 해체가능성이 커진다.
  • 위 두 가지가 약하면,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이나 교육 과정으로부터 학습(마치 모태신앙 처럼)되지 않고 인위적으로 해당 내용을 스스로 학습하거나, 주변에 의해 주장되어져야 하는데, 그 결과는 ‘선택 가능한 대상’이라고 인식되어 역시 해체되기 쉬워진다.

 

가장 강력한 상상의 질서는 그 ‘질서’ 밖의 방법과 논리를 상상조차 하지 못 할 정도로, 마치 누구나 의심할 수 없는 자연의 기본 원칙처럼 느껴져야 하고, 그 밖의 방법으로 살아 나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고, 상상하더라도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워야 한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상상의 질서, 특히 다른 것들 보다 강한 지위와 힘을 구축한 상상의 질서들은
(1) 물질 세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2)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3) 상호 주관적이다.

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제 하나씩 예시를 함께 보며 살펴보자.

(1) 물질 세계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엮여있기.

‘상상의 질서’는 (우리가 장기간에 걸친 역사, 문화를 살펴보면 자명하게도) 특정 시대와 지역에서만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상상의 질서’일 수록 장기간에 걸쳐 진실로 믿어져 왔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질서’가 단순히 책에 쓰여있는 글귀일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거나, 실제로 생활의 양식에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그럴 수록 더욱 더 실제처럼 느껴지고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저자가 예시를 든 것을 보자면 이렇다.

– 과거에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어른이든 아이이든 ‘개인의 방’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귀족의 커다란 성(城)이라도 그런 구분이 없었는데, 이것은 개인보다 집단을… 개인의 삶보다 계급과 가문, 집단의 권위와 영향력을 더 중요시한 ‘질서’가 건축에 반영된 형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개인’을 구분하기 어려웠고, 오직 그들의 가문과 개인의 이름인 성명(姓/Family Name 과 名/Given Name)이 지킬만한 것이었기에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 가문의 위신을 세워야 했다.

읽을거리 : 개인(個人, Individual)

개인은 영어 individual을 번안한 낱말이다. 사회, 문화 등 다른 여러 낱말과 같이 개인 역시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번안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individual은 영어 indivisible에서 파생된 낱말로 더이상 나뉠 수 없는 단수를 뜻한다.

서양에서 개인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인구 조사와 형이상학에서부터이다.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단수로서 개인은 고유 개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7세기에 이르러 개인주의가 발현되면서 철학, 법률, 사회 이론 등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 출처 : 위키피디아-개인

이외에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라고도 불리는 ‘돈’'(money)’도 강력한 ‘상상의 질서’의 산물이다. 상호간 신용의 증표이자 재화교환의 수단으로써 셀 수 있는 것이면 모두 화폐로 이용되어 질 수 있었다.  초기에는 조개껍데기로부터 시작해서, 금화/은화등을 거쳐 지폐로, 그리고 금본위제 폐지 후에는 단순 지폐를 넘어 비트코인과 같은 전자/가상화폐(사실 현물이 아닌 이상 돈은 상상의 산물인 만큼 ‘가상화폐’라는 말도 아이러니 하다.)로 까지 ‘돈’이라는 상상의 질서가 확장되는 영역은 매우 커지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돈’이 실제 세계와 단단히 엮여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도 ‘돈’으로 내가 원하는 장난감과 과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적 체험을 통해 학습하게되며, ‘돈’은 종교/문화/국가/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넓게 통용되는 ‘상상의 질서’ 중 하나이다.

 

(2) 태어날 때부터 우리 욕망의 형태를 알게 모르게 결정

우리는 강력한 ‘상상의 질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릴 때 부터 개인의 욕망의 형태를 외부에 의해 형성되어지고 만들어진다.  그리고 개인을 넘어 여럿의 사람들은 함께 ‘대세’ 또는 ‘유행’을 만들어 나가면서 새로운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할 것이다.’ 또는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한다’라는 것과도 같다. 혹자는 ‘남들이 좋아하는 것은 싫다. 난 나만의 특별한 것을 좋아한다’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도 욕망의 형태를 결정 당한 것과 다르지 않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방향만 다를 뿐 해당 ‘차원’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남들과 같은가 다른가가 아니라, 욕망(선호하는 디자인, 휴가의 형태, 가고 싶은 여행지, 라이프스타일, 갖고 싶은 물건 등)의 결정에 사회 집단의 흐름에 영향을 받고, 또 그 영향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서로 동조화를 통해 증폭시키거나, 반대의 흐름을 만들어가면서 분화되고 또 재 결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상상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욕망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욕망’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에서 그 상상의 질서는 더욱 강력해진다.

저자가 예시를 드는 것은 이렇다.

– 요즘 돈의 여유가 있는 부부는 관계가 악화되면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과거 이집트의 억만장자라면 아내에게 더 멋진 피라미드를 지어주었을 것이다.
– ‘당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는 트렌드는 20세기 소비지상주의와 19세기의 낭만주의 신화가 결합한 것이다. (그 ‘마음’은 기존의 상상의 질서가 만들어준 욕망이지 진짜 당신의 마음이 아닐 확률이 더 높다) 특히 다양성을 권하는 낭만주의는 소비지상주의와 결합하여 다양한 여행을 ‘체험의 상품’으로 판매한다. 그래서 파리는 도시가 아니고 인도는 나라가 아니다.

 

(3) ‘상호 주관적’이어서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객관적이라는 것은 사람의 의지나 믿음과 상관없이 존재하거나 실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저자는 방사능을 예시로 들었다. 방사능이 있건 없건 방사능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주관은 반대로 사람의 의지와 믿음에 따라 존재하거나 영향을 주고받거나 하는 그 무엇이다.

상호 주관적이라 함은, 각각의 주관적 믿음을 연결하여 이루어진 그 무엇이다.  그래서 사회구성원 일부가 사라진다고 해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세대를 이어 계속 ‘상상속의 질서’는 살아남게 된다.

저자가 예시를 드는 것은 이렇다.

– 자동자 회사 푸조는 (정확히는 ‘회사’라는 법인은) 실제하지 않고 프랑스의 상법과, 관련 서류와 자본주의와 돈과 비전등이 얽혀 상상속에 존재하지만 실제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존재이다. 이 상호 주관적으로 인정받은 존재는 누구 한 사람이 부정한다고 해서 있던 것이 없다라고 정의되거나, 없던 것이 새로 생겼다고 인정되지는 않는다.  세상의 수백만명 이상이 공유하는 상상속에서 존재하는 회사인데, 만약 푸조의 CEO 한명이 푸조는 없다, 회사는 없다라고 외친다면 그는 곧 정신건강이 이상하다고 판단되어지고 그 CEO자리는 곧 다른 사람이 앉혀질 것이다.

 

 

상상속의 질서 밖에서 바라보기

인간은 인지혁명을 통해 ‘상상속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능력과 그 것을 바탕으로 보다 높은 지적인 수준을 이루어 왔기에 지금과 같이 ‘지구를 지배’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농업혁명, 과학혁명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인지혁명에 보다 높은 중요도를 두고 싶은 이유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로 – 물론 실제적인 음식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과학에 의해 의식주의 개선과 편익의 증진도 필요하지만 –  심리와 감정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글에선가 ‘행복한 사람들은 다양성을 포용할 줄 알고, 관용의 미덕을 안다’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어느 면에서는 충분히 공감가는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서 다양한 소식을 접하면서, 또 더 자유롭게 세계에 나가볼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가치관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 더 관용의 폭을 넓히고 우리가 따라왔던 ‘상상속의 질서’에 대해서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갖게 되었다.

그러나 주변을 살펴보면 개인에 대해서는 다른 ‘상상속의 질서’를 신봉하는 것에 대해 관대하면서도 점차 그 범위를 키워가다 보면 더욱 강력한 ‘상상의 질서’에 접하게 되는 터라 그 관용의 정도가 줄어드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모르는 각 개인들의 행동이나 믿음에 대해서는 ‘뭐~ 그럴 수 있다’, ‘저런 사람도 있네!’라고 하면서도, 우리 가족, 팀, 회사, 국가로 커지게 되면 ‘이래야 한다’ 라는 스스로가 믿는 정의와 질서에 대한 강요가 커지는 것 같다. ( 한국에서 먼 이슬람 국가들과 같이 지역적/문화적등으로 다른 먼~ 국가에 대해서 우리는 관용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경우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혼동하지 말자. )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상상의 질서’를 꿰뚫어 보거나 부수어야 하는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마치 영화 메트릭스에서 보여지듯 진실을 꼭 알아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 듯 말이다. 하지만 또 거꾸로 특정 ‘상상의 질서’만을 신봉하여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내가 이루어야 할 욕망의 결과물이며, 만약 그것을 못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어 두었으면 좋겠다. (특히나 네 신념을 내게 강요는 하지 말아달라.)

특히 A라는 ‘상상의 질서’로 자존감이 충족되지 않자 금세 B라는 ‘상상의 질서’로 갈아타면서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통해 자존감이라도 지키려고 하는 ‘정신승리’ 방법을 너무 내세우지도 말자. 그래봤자 결국 ‘상상의 질서’의 신봉 대상만 슬쩍 바꾸었을 뿐 그로 인한 행복이 오래 갈것이 아님은 우리 서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실패하면 빨리 인정하고 배우고 익혀서 넘어가자. 이 방법이 도리어 ‘상상의 질서’를 하나의 게임의 룰로 보고 더욱 인생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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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저자의 방대한 담론 때문에 나의 짧은 지성으로는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침 기억난 ‘열자’에 소개된 일화를 붙임으로써, ‘상상속의 질서’에 대해 개인적으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것을 요약하며 마친다.

중국  제(齊)나라때 세도가 전(田)씨가 백성들로 부터 잔치를 위해 많은 선물과 음식을 가져오자, 전씨가 감탄하며 말했다.
하늘의 은총이 참으로 깊구나! 인간을 위해 곡식과 물고기, 날짐승등 온갖 먹을 것을 내리고 길러 키우게 하였구나!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포씨 성을 가진 12살 소년이 말하길,
“아닙니다. 천지의 만물은 누구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몸집크기, 힘, 지혜의 차이들과  생존의 필요에 의해서 서로 잡아 먹히거나 지배를 당하는 것이지, 결코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기에게 피를 빨리는 사람은 모기를 위해 태어났으며,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사람은 호랑이의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입니까?
* 열자(列子) – 누구의 지배나 착취를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님을 비유 / 또는 역지사지의 폭을 최대한 넓혀야 함을 비유

이 글에서 ‘상상의 질서’에 대한 의문, 하늘의 권위를 빌려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류, 인권(자연권)의 확대,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관용(tolerance)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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