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위키백과 설명 링크)라고도 읽혀지며, ‘물욕과 인습의 사회에 항거, 자연과 인생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실험’으로 대표되는 그의 생애(1817~1862)에 쓴 저작물 중 ‘월든’이 상당히 알려져 있다고 한다. 생각을 많이하고 홀로 글을 쓴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의 글도 죽은 뒤에 출간된 것들이 더 많은 듯 하다.
에머슨과 함께 (친분도 있고…) 초월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데, 그의 그러한 정신은 “시민 불복종“으로 이어진마하트마 간디의 인도독립 운동과 킹 목사의 시민권 운동 등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의도가 그랬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노예제도와 멕시코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월든’ 숲에서 홀로 오두막을 직접 짓고, 월든 호수에서 낚시를 하면서 2년여 동안 체험하고 관찰하며 생각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월든’이다.
‘월든’의 번역본에 있는 띠종이에 있는 여러 찬사들에 대해서는 (내 생각이 짧아서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용이 풀어져서 서술하다가 또 저자의 생각이 나왔다가, 또 반복적으로 환경등을 묘사하는 글이 워낙 길~다 보니, 자꾸 끊기게 되고 마저 다 읽는데만도 띄엄띄엄 1년이 걸렸던 것 같다.
읽으면서 밑줄 쳐 놓았던 부분과, 요즘 읽었던 다른 책들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사뭇 ‘다른 듯 하지만 비슷하다고 느낀’ 부분을 연결해서 정리한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이 결국은 언제나 일인칭이라는 것을 흔히 잊어버린다.”
맞다. 모든 사람의 ‘말’들은 ‘그냥 그 사람만의 생각일 뿐’이니, 그 말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응징해야겠다거나 바로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덜 들것 같다. 물론 ‘개인적 의견입니다만…’ 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겠다.
여하간, ‘소로우’의 말도 그냥 개인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고 읽자.
2. 찌들림(?)에 대해서
“내가 보기에 이 고장 젊은이들의 불행은 농장과 주택, 창고와 가축과 농기구 들을 유산으로 받은 데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일단 얻으면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 감독일 때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더 간소하고 결핍된 생활을 해왔다.”
우리는 노예감독이 없어진 이 시대에, 스스로 노예감독이 되어 자기계발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자기를 채찍질하며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것 아니냐는 ‘피로사회(한병철–가 주된 내용이라고 느꼈다)’ 또는 ‘왜 우리의 노동은 우울한가’와 같이, 우리는 가진 것(재산, 명예, 지식 등)을 지키기 위해…또는 가지기 위해 인생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피로사회 & 왜 우리 노동 우울해? 책에 대한 짧은 정리는 이곳 링크에 있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 (넓은 우주에서 뭐 그래봤자…라는 시각이라면야…^^) 이기는 한데, 좀 재미가 없다. ‘가지지 않아서 맘은 편할지 몰라도, 가짐으로써 시도함으로써 욕심을 부림으로써 느끼는 희노애락도 있어야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도 ‘심플하게 산다’에서 말하는 것 처럼 가끔은 단출하게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소유당하는 인생’은 좀 비굴해지는 것 같지 않나…^^;
“집을 마련하고 나서 농부는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실은 더 가난하게 되었는지 모르며, 그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때 마침 소로우는 같은 말을 해준다. 그런데 일부 물건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그래도 ‘의식주’에 해당하는 ‘집’에 대한 것은 참으로 누가 누굴 소유하는지 불분명해도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이 든다. 이 소로우의 말은 지금의 시대에도 통하는 말이다 ‘하우스 푸어’라고….
이제 물건에서 부채로 촛점이 이동하다가, ‘일’로 넘어간다.
“실상 채무액이 농장 가격을 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농장 자체가 큰 골칫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농장을 상속받는데 그 이유는 “농장 사정을 자기가 잘 알기 때문”이란다.”
회사나 사업도 비슷한 것 같다. 겉으로는 ‘잘 알기 때문’과 ‘책임감 때문에’로 표현되지만 가끔은 ‘나 아니면 안될…’과 ‘내가 제일 잘해…’ 때문인 경우도 많다고 본다. 그 도전 정신을 훼손할 마음은 없지만 혹시나 ‘프로그래머의 치킨집 차리기’ (외부 링크, 159페이지나 됨) 처럼 ‘내가 하면 다 잘 될 것 같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3. 자신의 ‘일’에 대해
진짜 스스로 일하는 즐거움을 모른 채, 그냥 ‘소유’ 때문에…또는 그냥 ‘일’을 해야한다고 하니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남은 평생을 무기력하게 살면서 이른바 ‘가벼운 읽을거리’로 지적 능력을 소모시켜버린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 ( ‘무도병’은 여러 원인으로 인해, 의지와 상관없이 손발이 춤추듯 움직이는 병)
이 분은 왜 이렇게도 남 사는 것에 대해서 뭐 이리 말이 많으신가…싶기는 한데, 나름 심오한 고민이 있으셨으리라…생각하고….아마도 인간 본연의 삶과 자연에 가까이 가려는, 손수 꾸려가는 삶에서 멀어져가는 당시(?)의 현대인에 대해 참 답답해보였었나보다. 물론 지금의 뉴스와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지만, 그래도 그냥 이 모습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인정하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소로우는 ‘스스로 일구어 나가는 것’을 통해서 인간이 독립적인 생각과 함께 자연에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집 짓는 일의 즐거움을 영원히 목수에게 넘겨주고 말 것인가? “
지금도 ‘…아빠 처럼 어른이 되면~♬ 우리 집은 내손으로 지을 거에요~~♬’ 노래처럼, 스스로의 집을 지으려는 사람은 지금도 많다. 어쩌면 ‘의식주’에 대한 것은 인간의 본능에 숨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좀 제대로 하려면 돈 많이 든다.) 돈도 돈이지만, 돈 보다 전문화된 지식이 없어서 힘들 것 같다는 두려움, 주변에서 ‘힘들텐데’ 라는 말이 더 힘들게 한다. 그보다도 ‘이반 일리치’라는 사람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라는 (철학?)책에서 아래처럼 주장하더라.
“직장 밖에서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가 사라진 것처럼 스스로 선택하는 행위로서 ‘집을 짓는 일’은 이제 사회 이탈자 아니면 한가한 부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전통적인 자급 기술이 쓸모없어질 때(사회에서 경제 논리로 사라질 때) 가장 먼저 고통 받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란 걸 알 수 있다. 직업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 버렸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집 짓는 일의 즐거움’은 불가능하다. 소비를 통해서 집을 얻어야하고, 집을 짓더라도 여러 법적 허가와 전문가의 힘을 빌려야만 승인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한다. 이제는 사전 허가 없이 집을 지어도, 누군가의 병을 고쳐 주어도 안된다. (불법이다!) – 법과 이익의 먹이사슬로 짜여진 판에 맞춰야만 하는 것이다.
– (이반 일리치 /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옮겨쓰기 귀찮아서 사진캡쳐.
소로우는 그렇게도 반대했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그 반대방향으로 많이~많이 흘러갔다. 이반 일리치도 칼을 세워 비판했지만 반대로 열심히 흘러가고 있다. 이 두명이 살아있다면 아마도 비슷한 관점으로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서도 ‘생각없이 이익만 쫒아 남들 하는대로 무조건 휩쓸려 다닌다고…’ 무척 비판했을 것 같다.
4. 주체적(?)인 실행에 대해
(요즘은 국정교과서 이슈로 ‘주체적’에서 ‘주체’란 말만 나와도….)
“전에 말했듯이 홀로 여행하는 사람은 오늘이라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동행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출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마라.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선실에 편히 묵으면서 손님으로 항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인생의 돛대 앞에, 갑판 위에 있기를 원했다. 나는 이제 배 밑으로 내려갈 생각은 없다.”
눈치 보지 말고, 기다리지 말고, 편한데 숨지 말고 혼자서라도 나아가라는 이야기렷다.
하지만, 너무 서두른 나머지 ‘남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적 표준(Standard?)’에 맡기는 실수는 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을 개발하기 위하여 서두른 나머지 수많은 영향력에 자신을 내맡기지 마라. 그것도 일종의 무절제이다.”
아마도…성장과 성취보다 중요한 것이 ‘나’이고, ‘나’ 자신의 선택과 용기를 따라 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중국의 인기(!) 교수의 ‘나를 지켜낸다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마무리.
노자사상과 비슷한 류(流)에서는 ‘헨리 데이비즈 소로’를 상당히 많이 이야기 하더라. 어쩔땐 간혹 추앙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나로서는 철학적 깊이가 부족해서인지 취향이 달라서인지 큰 공감을 얻지는 못했지만. 지금 시대에서도 통할듯한 이야기도 종종 보여서 몇몇 페이지에서는 깊이 집중해서 읽기도 했다.
소로우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다른 모든 저자들에게도 남의 생활에 대하여 주워들은 이야기만을 하지 말고 자기 인생에 대한 소박하고 성실한 이야기를 해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
이렇게 ‘소로우’의 글을 읽고, 기억에 남는 것을 뽑아 생각을 쓸…..시간에, 밖에 나가서 뭐라도 만들걸 그랬나보다. 왠지 좀 허탈하다….
끝.
@ja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