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독후감]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제현주

 

# : (생활의 달인에서) “TV 속 달인들은 하나같이 그 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식을 공부시킬 수 있었던 것을 자부심의 이유로 꼽는다.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의 대가로 얻은 부산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 : “일은 괴로운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래야 우리에게는 대가를 받을 자격이 생겨난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찰을 내놓는다. “사냥꾼인 아버지가 사냥한 짐승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듯, 농부인 아버지가 곡식과 채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듯, 현대의 샐러리맨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가족을 위한 노고와 희생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 급기야 타츠루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불쾌함’이라는 카드를 가정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 자원 배분과 결정의 순간에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에서…

IMG_3933 2015/12/05 저녁

‘일’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은 좀 과장하자면 배분의 정의와 경제체제의 문제까지도 번져가는 복잡한 고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책에서 한 마디씩 거들어 주었다. ‘왜 우리의 노동은 우울한가’, ‘피로사회’,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 ‘월든’에서 등등…

IMG_2459 그 중에서도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는 많은 통찰과 공감되는 주장을 담은 책이고, 왠지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을만한 경력에 도달한 사람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희망고문 하지 않는다. 이열치열이라고 해야하나…당신의 고민을 대신 치열하게 해준다.)

책을 읽어 본다고, 바로 ‘일’에 대한 환경이나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도움을 줄 것이다. 그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참 많아서 모두 다루기는 힘드니 몇가지만 찍어서 보자.
살펴보다가 흥미로우면 책을 사서 전체를 읽어보자.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2015년 여러 출판사 사장들이 뽑은 추천 책에서 최다득점(!)을 한 책이라고 하더라.

그럼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를 띄엄띄엄 읽어보자. (책보다 블로그 글쓴이 말이 더 많다. 책 내용은 글 아래 부록을 봐주시라.)

 

1. 당신의 직업은 천하지 않아서 만족스러운가?

시작은 이렇다.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흔치 않다.”

아마도 ‘노동자’ 라고 하면 시스템에 부속된 노동력이란 느낌 때문인지, 피지배계급인 ‘노예’의 어감이 살아나서인지, ‘난 아냐~’라는 열외의식의 표현으로 느껴진다. ‘노동자’라고 하면 왠지 뉴스에나 나오는 노동투쟁 이야기인 것 마냥, 스스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때 소셜 네트워크에서 회자되었던 내용인데,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원문은 어디인지 아무래도 못 찾겠다는…)


(출처와 저작권내용을 못 찾겠습니다. 문제되면 링크로 바꾸겠습니다.)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부모처럼, 일의 귀천(귀하고 천함)을 나누어 본다. 그런데 두 번째 이야기하는 왼쪽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한 술 더 떠서 어줍쟎은 엘리트의 지배욕구까지 밑에 깔려있는 듯한 뉘앙스가 슬쩍 풍겨서 기분이 좋지많은 않다.

위 두 부모의 공통된 입장은, 열심히 ‘공부’해서 귀한 직업을 가지므로써 천한(?) ‘노동자’라는 딱지를 떼는 것이다. ‘일의 귀천’을 먼저 기준으로 두고, 거기에 우리 자신(사람)을 공부를 통해 맞추어 나가려 하는 것이다.

“공부가 불쾌함의 투입으로 전락할 때 공부는 미래에 화폐를 벌어들이기 위한 도구적 활동일 뿐이다.”

교육을 이야기 할때, ‘개천에서 용난다’느니 ‘사회적 신분(마치 계급 사회인것마냥) 상승’을 이야기 하는 것 부터가 그 증거라고 본다. 세속적으로 ‘-사’붙는 직업들을 목표로 공부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일’에 대한 관점을 그저 귀하냐-천하냐로만 나누어 본다면, 다음에 이야기 될 일에 대한 고민들은 그저 배부른소리일지도 모르겠다만, 귀해도 노동자(일하는 사람)이고 천해도 일하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아도 노동자고, 집에서 가사노동을 해도 노동자다. 예외없다. (완전한 금수저는 예외로…?)

 

2. 불쌍한(?) 지식노동자들

세상을 소비위주로 해석하는 프레임에서 ‘노동자는 소비자이고, 그들은 여가에 대한 선호도의 증가에 따라 필요에 따라 노동을 하는 존재’라고 포장되었다. 이 교묘한 지적 수완에 휩쓸려서 자기착취에 빠져서 ‘노동자’가 아닌척 하려고 애쓰는 (그래서 노조에도 안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화이트 칼라’라고 불리는 지식노동자들이고, 어찌보면 ‘일의 귀천’ 논리 때문에 더 불쌍해지는 노동자들이다.

“초등학교부터, 심하게는 그보다 어려서부터 30대에 이를 때까지 ‘좋은 직업’ 또는 ‘좋은 직장’을 위해 달리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달한 곳에서 최소한 일주일에 5일,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보낸다. 그런 형편에 “일은 일일 뿐”이라는 말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노동자들은 ‘노동자’자리에도 가지 못하고, ‘소비자’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계속 ‘노동’을 한다. 그저 ‘(월세, 분유값, 교육비…) 소비를 위한 돈’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이 싫다. ‘그저 돈 벌려고 일해요’가 싫다는 것이다. 난 ‘돈 버는 기계’가 아니고, ‘난 더 값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에다가 ‘-사’나 ‘-님’자 붙는 ‘권위’도 붙여보고, ‘돈을 제대로 벌어서, 자유를 얻겠다’며 달려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자기 자식 빼고는)남들에게는 ‘너가 좋아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라고 하고, 잘 안된다고 하면 ‘노력이 부족하다’고 나무란다. 이런 희망고문의 말들은 ‘죽을 때 후회하는 진실’이라고 하더마는, 현실에서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열정페이’, ‘N포세대’, ‘헬조선’이라는 공허한 메아리가 돌아온다.

일의 귀천을 따지는 것만으로는 ‘일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다.  ‘일’에 대한 복잡하게 얽힌 고민은, 자신도 잘 알면서 스스로를 속이자고 하니 괴로운 것에서 시작한다.

“일을 기꺼이 사랑한다고 해도 슬프고, 사랑의 마음을 거두려 애써도 괴롭긴 매 한가지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이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 행운아다.”

풀어말하면, ‘나는 내 일이 좋아서 하는거야’라고 하자니 ‘열정페이’와 ‘정신승리’를 강요당하고, ‘일이야 뭐 돈벌려고 하는 거지 거기서 뭐 큰 걸 바라겠어?’라고 하기엔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일’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행운아? 행운아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또 무척 잘 해서) 생계 걱정을 넘어서 그 이상을 벌어들이는 사람을 말하겠지.

이것부터 정리해보자.

 

3. 사람은 원래 하고 싶은 것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옛 어르신들이라면 ‘일’에 자아실현이니 꿈이니, 재능을 붙이다니 배부른 소리한다고 할 것만 같다. 만약 그 말에 비아냥이 섞여 있다면 그들은 ‘부러워서’그런 말을 하는 거다. 부러우면 지는 거니까, ‘잘 살게 되었으니 인권과 민주주의는 좀 무시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라는 말로 합리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열심히 스펙쌓아 입사한 회사를 금방 관두기도 하는 세상이다. ‘재미가 없다’, ‘꿈을 키울 수 없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 가 ‘돈 벌기’와 대등한 경쟁(?)을 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래서 직업의 귀천 다음에 있는 고민의 차원은 이렇다.

image
( Bud Caddell의 일에 대한 다이어그램
일에 대해서 잘 표현했다고 상당히 ‘유명’해서 패러디도 많다.)

‘귀 vs 천’ 처럼 이분법으로 안 나뉘어진다. 그래서 문제다.
위 다이어그램을 잘 살펴보자. 한가운데에는 ‘꿈’이 자리잡고 있다. (몽상이라서 꿈인지, 희망이라서 꿈인지는 모르겠고…)

‘꿈’은 꾸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위로하는 말을 붙이며 폄훼 한다. 그래서 ‘먹고 살려면 뭐 그렇지’라고 둘러대지만, 자꾸 속이 쓰리다. 그래서 용기 있게 ‘꿈’을 향해 속도를 내니 ‘처자식 굶어 죽이려고 그러냐’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을 살펴보면….선택은 어떻게 (=잘하는 것 부터? 돈 버는것 부터? 하고 싶은 것 부터?) 했어도, 사람들은 점점 교차점인 ‘꿈’의 영역으로 다가가려고 애를 쓴다. 누구는 ‘돈 벌기’ 부터 가득 채워놓아야 그 다음 부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하고, 누구는 ‘하고 싶은 것 부터’ 하다보면 언젠가는 ‘돈도 벌게 된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물론 ‘잘하는 것’ 부터 열심히 하면 저절로 ‘좋아하게 되고 돈도 번다’는 주장도 있다. 다 맞다.

꿈을 찾아가겠다는데 길이 뭐 한가지겠는가? 알아서 가는 것이지.

 

4. 그런데 뭐가 문제야.

개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데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문제고, 안해도 문제되는 것이 사회나 주변관계에서 생긴다.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특권임을 은연중에 알고있다. “나는 일이 재밌어”라는 말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 자체가 즐거운 것인지, 즐거운 일을 한다는 특권을 즐기는 것인지, 그 둘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일이 곧 자기 자신인 사람 앞에서 우리는 초라함을 느낀다. 일이 돈벌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하는 자신은 그 앞에서 속물이거나 게으름뱅이, 현실과 타협한 비겁자처럼 보인다. 누구도 그런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일상의 반경 안에 놓이길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일의 ‘귀천’에서 남들이 귀하다고 하는 직업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을 더 부러워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아직 과도기(!)라서….스스로 정신차리지 못하면 (특히 재능기부니 뭐니하면서) ‘열정페이’의 논리로 착취당한다. 반대로 ‘열정과 성과’에 걸 맞는 보상을 달라고 하면 ‘지깟게 그럼 그렇지. 돈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냐?’라면서 ‘일이 곧 자기자신인 사람’을 폄훼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버드 캐델의 다이어그램 처럼 한마디로 ‘다양하다’, 그러니  ‘일’은 ‘돈 벌이가 우선이다’라고 하든, ‘좋아하는 것’이든 ‘잘하는 것’이든 괜히 트집잡거나 훈수두려고 하지 말자. 많은 사람들이 점점 그런 생각을 갖게될 수록 문제될 것은 사라질것이다. 이미 많이 사라졌다.

 

5.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유행

그런데 요즘의 사회는 ‘좋아 하는 일’에 무게를 더 많이 싣는다. ‘피로사회’에서 한병철의 주장 처럼 ‘자기착취’의 형태로 서로 경쟁하게끔 해 놓는 것이 노동자를 착취하기 더 유리하기 때문에 교묘하게 발전되어 온것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모든 면이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일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래도 싫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면 아직은 그 일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 좋아함이 성립하는 조건’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가 없다면 ‘좋아한다고 지금 생각하는 일’일 가능성이 크다. 열정이나 꿈, ‘좋아하는 일’ 같은 말이 절대적 목표인 양 추구되니, 일의 리얼리티 앞에서 모두가 속수무책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래서 어느 스님이 취업준비생과의 상담에서 그랬던가…. ‘일단 돈 버는 일 부터 하세요. 그러면 좀 정신차리고 생각을 하실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또 다시 선택을 하셔도 됩니다’ 라고 한 것이리라.

그런데, 심지어 그 ‘좋아한다는 것’이 자기 생각인지, 누가 넣어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스물 몇 살이 되도록 좋아하는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하도록 교육받는 마당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자리를 구할 때가 돼서야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면 그 좋아하는 일은 ‘해야 하는 일(=돈 주겠다는 것)’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좋아함’을 강요받는 것이다.”

이것은 염려할 필요없다. 강요받아서 선택했는지 아닌지는 살다보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대학교에서도 중퇴하고 편입도 하고, 직장도 옮기지 않던가?

 

4. 마무리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얼른 마무리하자.

  • 결론 1 : 시작하는 단계라면 어떤 관점으로 일을 보든지, 일단 시작하기 좋은 곳(하고 싶은것? 잘하는것? 당장 돈이 되는것?) 부터 시작하면서 점점 넓혀보면 된다.
  • 결론 2 : 이미 많이 왔다면, 지금이 우선순위를 바꿀 전환기인지를 생각해보자. (미안하다, 정답은 없다.)

 

만약, ‘잘하는 것’ 또는 ‘돈이 되는 것’ 부터 시작해서 ‘꿈’으로 다가서고 싶다면, 이 책을 소개한다.  Act Big, Think Small — 간단히 요약하면, ‘실력’으로 부터 시작해서 전략(?)적으로 일의 범위나 권한을 키워나가면, 멀지않아 너가 하고 싶어했던 ‘일’을 손에 쥐게될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전환기라고 생각되면 이책을 추천한다. 더딥(The Dip) — 한줄요약은 ‘비범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라. 그리고 끝장을 봐라’ 라는 내용이다.

 

(일단 끝)


 

책 내용은 거의 이야기를 안했는데, 궁금해하실 분들도 있을듯 해서 관심깊게 읽었던 부분을 뽑아 보았습니다.
앞뒤 맥락이 없어서 부족하니 역시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에서 —

“돈벌이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일은 순전히 돈벌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일 자체의 재미나 의미를 묻는다면 그들은 코웃음 칠 것이다. 순진해빠졌다는 소리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왜 일을 하느냐고?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서지!” 여기서의 돈벌이는 밥벌이를 훌쩍 넘어선다. 돈은 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궁극의 목표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돈벌이로서의 일을 낮추어보는 세상이 있다. 지난해 ‘뉴스타파’의 인턴 채용을 두고 논란이 일자 뉴스타파의 최경영 기자는 트위터에서 “뉴스타파에서의 경험을 돈으로 계산하려는 분은 응시하지 마십시오”라는 일갈로 대응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거나, 잘하는 일만 하기 위해서 돈 벌리는 일을 미루기만 해서…) 돈을 적게 쓰는 삶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욕구를 무작정 줄여야 한다면 그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는 인간 욕구의 총량을 줄일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욕구를 다른 욕구로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욕구를 대체하려면 삶의 다른 배치로 들어가야 한다. 저비용 구조로 자신의 욕구를 재편하고 싶다면 다른 장소와 다른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상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 어떤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지가 우리 욕구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가격표가 없다면 인간은 게을러지려고 하고 그 능력과 상상력이 부패하고 녹슬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일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돈벌이에 쓰이지 못하는 것이 곧 세상에서 쓰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잉여임을 내세우는 모습에서는 ‘차이기 전에 먼저 차겠다’는 식의 방어 심리가 읽히기도 한다.”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은 “당신은 누구세요?”라는 의미다. 당신의 일은 당신을 설명한다. 타인과 세상의 시선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정체성을 되짚는 시선은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 시선이 세상의 시선을 고스란히 따른다면 돈벌이가 되지 못하는 일은 모두 쓸모없는 일에 불과하다. 결국 돈벌이에 나서지 못한 자신은 ‘잉여인간’인 셈이고 돈벌이가 아닌 모든 일은 ‘잉여짓’이 되고 만다.”

태국에서는 ‘일’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태국 사람들에게 ‘일은 괴로운 것’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가 보다. 태국에는 ‘사눅 sanuk’이란 말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 없는 즐거움, 현재의 활동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뜻한다. 우리말로 치자면 ‘재미’쯤에 해당하겠지만 태국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개념이라 할 만큼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태국 사람들은 사눅이란 것에 큰 가치를 두어 모든 활동을 ‘사눅(재미있는)’과 ‘마이 사눅mai sanuk(재미없는)’으로 나눈다”

““과정만으로도 즐거워요. 결과는(이 발표의 맥락에서라면 ‘보상 금액은’) 상관없어요”라고 모두가 생각한다면 결국 그 덕은 누가 보겠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 없이 ‘과정의 기쁨이 곧 보상’이라는 말로 만족한다면 놀이 같은 일은 이른바 ‘정신 승리’의 방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 이 동영상이 볼만하다.

 

 

““특정한 하나의 직업 안에서 스스로 마비되기보다는 어떤 가능성의 네트워크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을 선호한다는 게이츠의 말을 인용한다. 안락한 평생직장보다는 변화무쌍한 가능성의 세계에 투신하는 것이 오늘날 성공한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이다. 한 가지 기술을 익혀 그것으로 평생을 벌어먹을 수 있다면 안온한 삶일지는 모르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가능성의 네트워크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닥쳐오는 변화를 기회 삼아 살아가는 편이 낫다는 소리다. 근사한 말이 아닐 수 없지만 이 명제를 온몸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
–> 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 Nirvana 커트코베인

우리는 안정성을 원하되 반복성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은 대개 안정성 없는 반복성뿐이다.

“달인들 중에 그런 형편에 놓인 사람은 거의 없다. 성실한 노력을 쏟아붓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만은 장인답지만 그들이 놓인 조건은 그렇지 못하다. 달인들이 일하는 곳은 그들 자신의 공방이 아니라 기업이 운영하는 공장이나 대형 상업 시설이다. 그들의 작업물은 철저히 익명의 것으로, 기업의 상표가 붙을 뿐이다. 그들의 일은 자기 자신의 리듬이 아니라 기계의 리듬 또는 고객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생활의 달인에서) “TV 속 달인들은 하나같이 그 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식을 공부시킬 수 있었던 것을 자부심의 이유로 꼽는다.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의 대가로 얻은 부산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열정 노동 착취를 하나의 현상으로 처음 지목한 수작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 등장하는 장면은 그래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한 노동 운동가(!)가 ‘전국 영화인 노조’ 소속의 한 영화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잖아.”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형편이니 징징거리지 말라는 소리다. 사정이 이러니 일에서의 권리를 부르짖으려면 서로서로 불행을 전시하고 경쟁해야 하는 게임에 빠지기 쉽다. 베짱이가 되기 위한 게임과는 정반대의 게임이다. “억지로 하는 거죠”를 내뱉는 순간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루저가 되는 것처럼 “일이 즐거워요”를 외치는 순간 정당한 대가를 요구해서는 안 되는 팔자 좋은 한량이 되고 만다.”

스스로 ‘일 중독자’라 칭한다면 반성처럼 들리는 자기 자랑이기 쉽다. 많은 경우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다. 끊임없는 자신의 존재 증명, 일을 멈춘다면 자신의 가치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감각이 그들을 지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 바빠서요”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서요”라는 의미임을 우리는 안다. 끊임없이 일로 회귀하며, 무엇이든 일과 연결 짓는 열정가가 사랑하는 것은 사실 일이 아니라 대상화된 ‘자기’다. 그 ‘자기’를 더욱 아름답게 완성해나가려면 일이 필요한 것이다.”

““소비하는 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하며, 이를 통해 “‘사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친다고 지적한다.”

공부가 불쾌함의 투입으로 전락할 때 공부는 미래에 화폐를 벌어들이기 위한 도구적 활동일 뿐이다.
–> 그래서, 미리미리 공부하면, 시험 잘 보면 용돈을 보상으로 받는 집안이 많아진다. 공부나 일이나 불쾌한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일은 괴로운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래야 우리에게는 대가를 받을 자격이 생겨난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찰을 내놓는다. “사냥꾼인 아버지가 사냥한 짐승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듯, 농부인 아버지가 곡식과 채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듯, 현대의 샐러리맨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가족을 위한 노고와 희생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 급기야 타츠루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불쾌함’이라는 카드를 가정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 자원 배분과 결정의 순간에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 집에 퇴근해서 혹시 습관적으로 “아빠(엄마)는 회사에서 힘들게 돈 벌러 다녀왔쟎냐?” 라는 말 하지 말자. 아이들이 벌써 부터 “일”은 고생인 것.이라고만 배울라.

“그 괴로움이 희생으로서 의미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노동이 의미를 잃을 것이므로.
그리고 그 괴로움 만큼이 등가로 교환되어 대가로 돌아올 것을 우리는 기대한다. “내가 괴로움을 내놓았으니, 괴로움 등가를 이루는 무엇인가를 너도 내놓아야 한다.” 등가교환의 원칙은 도덕적 당위가 되어 서로를 압박한다.
직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괴로움을 투입하는 만큼 인정받는다.”

“그러니 진짜 성과를 따지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하는 평가-보상의 기제가 작동하지 못한다. 등가교환을 하려면 가치를 측정해야 하는데, 성과의 가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상황 변수가 작용하여 잘한 일에도 못한 일에도 핑계는 수만 가지다. 상황이 이러니 일의 결과를 따져서 ‘공정히’ 보상하는 것은 시작부터 실패하기 십상이다. 결국 일의 아웃풋output(성과)이 아니라 인풋input(투입)을 따지게 된다.”

” 상대의 다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름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해할 수 있어야 받아들이는 관계는 평등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해해주는 자와 이해 받아야 하는 자의 위계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점수에 따라 상벌이 매겨진다면 측정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의 유명한 말, “측정할 수 없다면 관리할 수 없다. – If you can’t measure it, you can’t manage it”가 달리 나온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측정할지 결정하는 곳에 권력이 있다.”

“돈을 절대 가치로 여기지 않는 개인은 상상할 수 있어도 그런 기업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기업이란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을 공부하면서 기업을 들여다보니, ‘어쨌건 숫자는 숫자다’라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편견이었다는 사실에 눈이 뜨였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숫자를 계산하는 방식에는 수많은 가치판단이 깔려 있다. 경제적 효율성을 불편부당한 잣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바로 그 때문에 개인의 삶에서도 모든 비경제적 욕망을 뒤로 미루며 사는 것을 ‘월급 받는 직장인’의 필연으로 받아들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회사라는 곳에서 월급으로 환산할 수 없는 욕망을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경제적 목적으로 수렴하지 않는 다양한 욕망을 담아내는 곳, 그게 직장이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정말 끝.)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