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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학아세(曲學阿世)는 당연한 것.

우리는 미래를 측을 하기 위해 힘쓴다. 내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지 아닌지 내 욕구를 채울수 있는지 아닌지를 미리 판단하여, 옳거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을 더욱 잘 하기 위하여, 예측을 위한 논리적 사고를 위해 여러가지 것들에 이름을 붙여줄 필요가 있었고, 비교하여 우월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더 나아가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힘도 이용하기 위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관념을 만들기도 하며, 보이지 않는 신념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던것 같다.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활동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허망한 꿈인지, 실현가능한 비전인지, 인간의 동물적 욕망인지, 문명화된 인간의 호혜적 베품인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등등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사람/집단이 스스로 추구하는 목표에 부합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익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옳지 않다고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학문이나 도덕적 명분을 빌리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장기적으로 그것이 손해가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두세수의 앞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하며, 또 거꾸로 지금은 당장 손해이더라도 미래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도 한다.

여하간, 
만약 ‘앎’ 하나만을 위해 학문의 길을 걸었다면 모르겠으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하며, 학구열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자원(지원금등)을 확보하려면, 기존 기득권세력 또는 보수의 편을 하거나(이것을 멋진 말로는 시장/학계의 경향), 일부러 비주류 경향(틈새시장을 노려서 튀어보이려면 일부러 소수자편에 서야하기도 하고)에 합류하거나, 바로 눈앞의 클라이언트의 요구에만 부응하거나 해야한다.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길을 걷는다면 어느 지원도 얻기 힘들고, 인기도 없을 것이다. 

특정 부류에 포함되려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며, 1차원적으로 너무 빤히 보이면서 쫒아가면 곡학아세(曲學阿世) 라고 불려지고, 두세수를 앞서서 움직였는데 헤게모니를 획득하면 Leading한다고 불려지며, 일부러 비주류로서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려하였으나 그마저도 관심을 얻지 못하여 실패하면 외로운 저항세력으로 불려진다.

사실 위 3가지 모두 곡학아세(曲學阿世)이기는 하고, 순수학문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지켜내려는 사람은 특정 부류에 포함되어 세상에서 현실을 체험하는 학자를 현실타협자로 볼 것이고, 또 반대로는 현실도피자로 볼 것 같다. 그러니, 옳으니 그르니 상대편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자기만의 논리적 주장만으로 힘을 빼기보다는, 얼른 그것이 세상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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